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중국 인민해방군/역사 (문단 편집) == [[중일전쟁]] == 섬서성으로 피신한 중국 공산당은 [[동정항일]] 운운하면서 산서의 [[옌시산]]의 영지를 침공하는 등 [[화북분리공작]]에 대응 중인 [[국민정부]]의 배후를 계속 공격하면서 그것이 항일이라고 선전하였으나 마오쩌둥의 동정항일은 옌시산의 반격에 참패로 끝났다. 중국 공산당은 다시 궁지에 몰렸으나 이들을 토벌하기 위해 파견된 [[장쉐량]]은 공산당의 공격에 잇달아 패할 뿐 전혀 실적을 보이지 못하고 있었다. [[만주사변]]으로 자신이 지배하던 만주에서 축출되어 낭인 신세로 전락했던 장쉐량은 공산당이 아니라 일본을 공격하여 자신의 영지인 만주를 되찾고 싶어했으나 일본과 정면대결이 어림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장제스와 중국 군부는 장쉐량의 주장을 일축하고 있었다. 가뜩이나 원하지 않은 초비작전을 맡아서 계속 피해를 입게 되자 장쉐량은 1936년 12월 12일 독려 차 방문한 장제스를 납치하고 [[서안 사건]]을 일으켜 국공합작을 강요했다. 장제스가 마지못해 동의하면서 국민당과 공산당의 내전은 중단되었고 1937년 일본제국이 [[루거우차오 사건]]을 빌미로 [[중일전쟁]]을 일으키자 정식으로 합작이 이루어져 공산당군은 형식상 국민당군에 편입되어 제18방면군이 되었고, 그 아래 화북지역에는 제8로군(팔로군), 화남지역에서는 신4군으로 재편되어 [[중일전쟁]]을 맞게 되었다. [[마오쩌둥]]과 공산당은 중일전쟁 기간 동안 자신들이 6~7할에 달하는 일본군을 상대하였고 [[장제스]]와 국민당은 후방에서 놀며 팀킬이나 했다고 거짓 선전을 하면서 자신들이 항일전쟁의 주역이라는 말도 안되는 개구라를 남발했지만 이는 추악한 거짓말로, 전쟁 초반의 [[평형관 전투]] 등에서 일부 활약한 공산당은 일본군이 산서성을 침공해 옌시산의 수도인 [[타이위안]]을 점령한 이후로 지극히 소극적인 방어전으로 전환하여 항일을 회피했다. 이 때문에 백단대전 이전까지 일본제국 육군은 공산당을 제대로 된 전투세력이 아니라 비적떼로 간주하여 상대하지 않았고 국민정부의 임시수도 [[충칭 대공습|충칭은 두들기는 동안]] 공산당의 중심지 옌안에 대한 폭격도 거의 하지 않았다. 그동안 공산당은 화북 전역에 해방구를 건설하였고 화중과 화남에서 [[신사군]]이라 불리는 유격부대를 활동시켜 국민당과 충돌했고 이 때문에 [[환남사변]]이 발생하기도 했다. 결국 [[펑더화이]]가 백단대전으로 일본군에게 어느 정도 타격을 주면서 일본군은 그제서야 공산당 토벌에 나서 공산당의 해방구를 섬멸하는 작업에 들어갔으나 [[신멸작전]]이라 불리는 그들의 잔혹한 작전으로 민심의 이반을 불러 일으켰다. 다만 일본군의 공포작전이 효과를 보아서 한때 화북 거의 대부분을 장악할 정도로 성장했던 중국 공산당과 홍군은 큰 타격을 입고 축소되었다. 하지만 1944년 일본이 다시 국민정부의 항복을 받아내기 위해 [[대륙타통작전]]을 감행하여 화북에 주둔한 병력을 죄다 화중, 화남으로 내려보내 일본군의 치안유지력이 약화되자 다시 해방구를 확장했다. 그리고 미국을 상대로는 자신들이 항일을 하고 있으며 장제스를 버리고 자신들을 중국의 대표로 인정해달라고 로비 활동을 벌였으나 미국이 이를 확인하기 위해 OSS 특작부대인 스패니얼 특공대가 화북에 상륙하자 이들을 억류하여 [[앨버트 웨드마이어]] 장군의 항의를 받기도 했다. 1945년 일본군이 중국군에게 항복하자 중화인민공화국은 일본에게 항복하라고 회유했으나 지나파견군 사령관 [[오카무라 야스지]]는 중화민국에 항복하기로 결정, 공산당을 상대로는 무력을 써서 저항해도 좋다는 지시를 내렸다. 하지만 세력의 중심이 북부에 있었으니 만큼 북부지역에 대한 장악이 서남부에 고립된 국민당보다 수월하여 소련군의 도움을 받아 일본군을 모조리 궤멸시켰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